한림학사 65세 김인경과 23세 수재 김구의 관계
고종 19년도 임진(壬辰)1232년 5월에 춘장(春場)의 과거(科擧)실시되었다. 이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정삼품(正三品)의로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종이품(從二品)을 겸하고 있던 김인경(金仁鏡)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한림학사(翰林學士)정사품(政四品) 김태서(金台瑞)가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임명되었다. 이 과거에서 장원(壯元)문진(文振)등 진사29명 명경2명이 급제하였다. 그는 열여덟(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23세의 나이로 춘장에서 장원을 능가할 만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김구의 초명(初名)]은 백일(百鎰)이라 하고 자(字)는 차산(次山)이요 호(號)는 지포(止浦)이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신동(神童)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김구(金坵)는 신라 마지막 임금의 경순(敬順)왕(王)의 후예이니 본관(本貫)은 부령(扶寧:扶安)이며 중시조(中始祖)는 세칭(世稱)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하는 김일(金鎰)이다 경순왕이 신라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넘겨주고 송도개성으로 떠날 때 에 마의 태자는 망국의 태자로서 부왕(父王)의 뒤를 따르지 않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麻衣)를 입고 초식(草食)을 하면서 불도(佛道)에 귀의하여 생애를 마친 분이시다.
태자의 4세손 경수(景修)는 고려조에서 문과 급제하여 이부(吏部)상서(尙書)를 지냈고 그 아들 춘(春)이 부령(扶寧)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함을 받았으므로 마의태자를 부령(扶寧)김씨(金氏)1세조로 삼고 있다. 마의태자의 9세손으로 金坵는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번춘장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시험관 이였던 金仁鏡으로 하여금 자신의 衣鉢을 전할 만한 인물로 지목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풍속에는 과거 급제자 들이 시험관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그 문생(門生)이 되어 평생 동안 스승처럼 섬길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니 좌주(座主)니 하여 부모와 같이 공경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지공거(知貢擧)와 같은 등급으로 급제한 사람을 전의발(傳衣鉢)이라고 했다. 김구(金坵)는 예(禮)를 갖추어 좌주(座主)인 김인경(金仁鏡)의 은문(恩門)을 찾아 가 배알(拜謁)하고 사은(謝恩)했다.
이때에 65세의 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 김인경은 23세의 수재(秀才) 김구(金坵)의 급제를 축하(祝賀)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 중국 후주(後周)시대 사람으로 노국공(魯國公) 화응(和凝)이 과거(科擧)에서 3인으로 급제했는데 나중에 시관(試官)이 되어 과거를 주관하게 되었을 때에 범질(范質)을 3인으로 발탁했다네. 범질이 시관 이였던 노국공 화웅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화응이 말하기를 자네의 문장이 당당히 장원으로 뽑혀야 마땅한 일이지만 낮추어 제3등으로 굽혀둔 것은 나의 의발(衣鉢)을 자네에게 전하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것 일세라고 했다니 재미있는 고사가 아닌가? 하면서 유쾌하고 인자한 표정으로 웃는 것이었다.
청년수재 김구는 어찌 그 말을 모르겠는가? 명종24년 춘장에서 장원을 빼앗기고 제2인으로 급제한 김인경(金仁鏡)이 이번고종19년 임진(壬辰)1232년 춘장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장원감인 나(김구)를 장원으로 뽑지 않고 제2인으로 낮추어 합격시킨 것은 당신(김인경)의 의발(衣鉢)을 전하기 위한 생각에서 그리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김구는 너무도 감격하여 다시 한 번 정중히 고개 숙여 이렇게 사례의 인사를 올렸다. “불초한 문생(門生)에게 급제의 광영을 주신 것만으로도 지극히 황감하옵거늘 은문(恩門)의 의발(衣鉢)을 전해주시고자 하오니 그 은혜(恩惠)와 자애(慈愛)를 무엇으로 보답하리까?” 의발(衣鉢)이라 함은 불교(佛敎)의 승려(僧侶)들이 사용하는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말함인데 곧 전법(傳法)의 표시가 되는 물건이다.
이렇게 좌주와 문생(門生)의 깊은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사랑하고 존경의 부자(父子)관계처럼 가까이 지냈으며 집으로 돌아온 김구는 오늘의 감격적인 순간을 잊을 수 없어 붓을 들고 의발(衣鉢)을 전하시겠다는 좌주(座主) 김신국(相國) 양경께 감사하여 올리는 글 상좌주김상국양경사전의의발계(上座主金相國良鏡謝傳衣衣鉢啓)을 지었는데 그 글이 그의 문집인 止浦集 권3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