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문정공

제목 지포(止浦) 김구(金坵) 선생 연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자 202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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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김구(金坵) 선생 연보(年譜)



신라 마직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태자(太子) ()(속칭 마의태자)의 후손(後孫)으로 공()의 휘()는 구(), ()는 차산(次山)이니, 초휘(初諱)는 백일(百鎰)이었다. ()은 김씨(金氏), 본관(本貫)이 부령(扶寧)이다.(부령은 지금의 부안현(扶安縣)



송영종 가정(宋寧宗嘉定) 4(고려희종(高麗熙宗) 7(1211) 신미(辛未)에 출생하시다.



고려 고종9년 임오(壬午) 공의 나이 12(公年 12) 4월 병신(丙申)에 국학진사(國學進士)에 오르다.



이 발(衣鉢)을 전하는 계(傳衣鉢啓)에 이른바 나이가 무산(巫山)의 수에 처음 성균시험에 재주를 견주었고 위수(危宿)의 차례에 이름이 조사에 오르게 되다(年遇巫山之峽而始試藝於成均齒?危宿之?而得登名於造士)고 한 것이 바로 12세란 말이다. 상고해 보건대 덕종(德宗) 원년(1032)에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곧 진사시(進士試)이다. 시험종류는 부 또는 육운시(六韻詩) · 십운시(十韻詩)이었다.



그 뒤에 혹은 성균시(成均試) · 남성시(南省試)라 하기도 하다. 그리고 또 의종(毅宗) 원년에 승보시(陞補試)를 설치하였으니 이것이 생원시(生員試)이고 시험종류는 시() () 또는 경의(經義)이였으니 그 이른바 성균시험에 재주를 견주고 조사에 이름이 오르게 되다한 것이 반드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참예하고 혹은 숭보시(陞補試)에 참예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께서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을 잘 하였으므로 해마다 하과(夏課)때 공보다 앞설자가 없어 동료들은 언제나 공에게 장원을 기대하였다 한다. 이 말은 여사열전(麗史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고종 19년 임진(壬辰) 공의 나이 22(公年 22) 5월 신축(辛丑)에 문과(文科)에 급제하다.



당시에 공의 문장이 가장 뛰어났으나 방()의 발표에 제2(2)으로 급제하였으므로 지공거(知貢擧)인 정숙공 김양경(貞肅公 金良鏡)이 제1(1)으로 급제시키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겨 말하기를 나도 제2인으로 급제한 사람이다.하고는 옛날 화노공(和魯公)이 범노공(范魯公)에게 의발(衣鉢)을 전한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위로하므로 공이 장문의 계()를 지어올려 감사하였는데 그 변려체(?)로 된 문체가 정밀하고도 간절하여 일반 사람들의 생각조차 못할 정도이었다.



이상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김양경(金良鏡)은 이름을 인경(仁鏡)으로 고치었다. 문순공 이규보(文順公 李奎報)가 말하기를 나를 이어 문형(文衡)을 잡을 사람은 학유(學諭) 최자가 있고 급제 김구(及第 金坵)가 그 다음이다하였다. 이상은 최자전(催滋傳) 또는 동국통감(東國通鑑) · 동국사략(東國史略)에 기재되어 있다.



공이 이미 급제한 뒤에는 벼슬에 급급하지 않고 독서하면서 뜻을 구하시다. 단평(端平) 원년 고종 21년 갑오(甲午) 공의 나이 24(公年24)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나가다.



처음에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에 보직되었는데 같은 고을 사람 황각보(黃閣寶)가 감정을 품고 유사(有司)에게 참소했다 재신 최이(宰臣 崔怡)가 공의 재주를 아끼어 구제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제주판관으로 변경하다. 이상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공이 제주에 계실 때 문청공 최자(文淸公 崔滋)가 부사(副史)로 있었는데 서울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과장(科場)의 부() 제목이 이러하더라고 일러주었다.



진효공이 효산과 함곡관의 험고한 곳을 점거하여 사해를 낭괄하다라고 하니, 최자가 공에게 말하기를 이 제목이 어려운 제목이라 시험삼아 나를 위해 지어 보여주었으면 합니다.하니 공이 웃으면서 이야기하다가 잠깐동안데 붓을 들고 전편을 완성했는데 한글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이에 최자가 탄복하여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글이 참으로 시부(試賦)의 표준이니 네가 삼가히 간직하여라하다. 이상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제주지방은 자갈이 많고 건조하며 본래 논(水田)은 없고 다만 밀 · 보리 · · 조따위가 생산될 뿐인데 소 · · 노루 · 사슴 등 짐승들이 마구 짓밟아 결실되는 곡식이 거의 없으며 그 밭도 옛날부터 경계가 없어 강포(强暴)한 무리들이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들어 백성들이 괴로워했는데 공이 부임한 즉시 백성들의 이러한 고통을 듣고는 돌을 모아 담을 쌓고 경계를 만들어 주어 백성들이 편리하였고 지금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이상은 동문감(東文鑑) 및 탐라지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고종 22년 을미(乙未) 공의 나이 25세 제주에 계시다.

고려 고종 23년 병신(丙申) 공의 나이 26세 제주에 계시다.

가희 원년 고종24년 정유(丁酉) 공의 나이 27세 제주에 계시다.

고려 고종 25년 무술(戊戌) 공의 나이 28세 제주에 계시다.



3년 고종 26년 기해(己亥) 공의 나이 29세 임기가 끝나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한림원(翰林院)에 임명되다.



4년 고종 27년 경자(庚子) 공의 나이 30세 권도()로 한림원에 입직(入直) 하던 중 서장관(書狀官)에 충당되어 몽고에 가다. 북정록(北征錄) 및 시()네수가 있다. (시는 문집에 실려 있음, 이상은 열전(列傳) 및 동문선(東文選)에 기록되어 있다.)



순우(淳祐) 원년 고종28년 신축(辛丑) 공의 나이 31세 몽고에서 돌아와 한림원에 계시다.



고려 고종34년 정미(丁未) 공의 나이 37세 옥당(玉堂 : 한림원)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제수되었다가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옮기다. 이때에 권신 최항(權臣 崔沆)이 새로 원각경(圓覺經)을 조각하고는 공에게 그 발문(跋文)을 짓게 했는데 공이 허락하지 않고 시를 지어 조롱하자(시는 문집에 실려있다.)항이 성내어 말하기를 나더러 입을 다물고 있으란 말이냐하고 드디어 좌천시키었다.



당시 온 국민이 불법(佛法)을 숭봉하여 상하(上下)가 모두 복을 구하는 도량에 분주하였다 항()은 이()의 아들이고 충헌(忠獻)의 손자로서 대대로 국명(國命)을 잡아 그 권세가 군주를 좌우할 정도이고 생살여탈(生殺豫奪)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조금이라도 그 뜻을 어기는 자에겐 반드시 모함하므로 공이 이때부터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최항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숨어 계셨다. 이상은 열전 및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5년 고종44년 정사(丁巳) 공의 나이 47세 비로소 한림원 지제고(知制誥)에 임명되다.



() 4월 정해(丁亥)에 최항(崔沆)이 죽자 공이 이때부터 벼슬에 나가다.



고려 원종 4년 계해(癸亥) 공의 나이 5312월 신유(辛酉)에 평장사 이장용(平章事 李藏用)과 문하성사유경(門下省事柳璥)이 글을 올려 공을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추천하다.(여사세가(麗史世家) 및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기록되어있다.) 동월 병인(丙寅)에 우간의대부 겸중대부국자제주 한림시강학사 지제고(右諫議大夫 兼中大夫國子祭酒 翰林侍講學士 知制誥)에 임명되어 표()를 올려 사양했으나(표는 문집에 실려 있다.)



왕께서 그 재주를 존중하여 윤허하지 않고 특히 비답을 내리기를 동방의 뛰어난 정기로 태어났고 서경(西京)의 문장 솜씨를 능가하도다하고 또 이르기를 지난번 몽주(蒙主)의 조서에 올린 글의 뜻이 간절하고도 판곡하였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대가 지어올린 표의 그 사연과 문장이 곡진하여 몽주를 감동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러한 칭찬을 하였겠느냐하다.(이상은 고려사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원종 5년 갑자(甲子) 공의 나이 545월에 왕명을 받들어 대장군 조문주(趙文柱)등과 함께 삼랑성 신니동(三郞城 神泥洞) 가궐(假闕)을 짓기 시작하다.



이달 경진(庚辰)에 몽주(蒙主)가 사신을 보내와 왕을 입조(入朝)하게 명령하므로 기축(己丑)에 국자제주 장일(國子祭酒 張鎰)로 하여금 몽고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표를 올려 가을에 가서 입조하기를 청하다.

이때 여론이 모두 의심스러워 했는데 중랑장 백승현(中郞將 白勝賢)이 참정 김준(參政 金俊)을 통해 아뢰기를 삼랑성 신니동에다 가궐을 지으면 입조하라는 일이 절로 묵살될 것이고 앞으로 삼한(三韓)이 진조(震朝) 즉 천자의 조정이 되어 대국이 도로 우리에게 와서 조회하게 될 것이라하니 왕이 이 말을 믿고 공에게 명령하여 대장군 조문주(趙文柱)와 장군 송송례(宋松禮) · 백승현(白勝賢) 등과 함께 처음 가궐을 짓게 하다. 이상은 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원종 8년 정묘(丁卯) 공의 나이 57세 감시시원(監試試員)에 임명되어 표를 올려 사양했으나 윤허을 받지 못해 드디어 사례의 표를 올리고는 이 회(李繪)등을 뽑았다. (여사선거(麗史選擧)에 기록되어 있다.) 10월 임오(壬午)에는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 삼조실록(三朝實錄)을 편찬하다.



이때 감수국사 이장용(監修國史 李藏用) · 동수국사 유경(同修國史 柳璥)과 수찬관 허공(修撰官 許珙)과 더불어 신종(神宗) · 희종(熙宗) · 강종(康宗)의 삼조실록(三朝實錄)을 편찬하다. 이상은 고려사제가(高麗史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원종10년 기사(己巳) 공의 나이 59세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다.



세자(世子)가 연회를 베풀어 주어 전(을 올려 사례하다.



이때 세자가 향학열이 있어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대의(大義)를 알았는데 공이 제주 이송진(祭酒 李松縉)등과 함께 창수(唱酬) 한 용루집(龍樓集)이 있어 세간에 전하다 때에 세자가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므로 공이 전()을 올려 그 연회를 사례하다 이상은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 · 여사제강(麗史提綱) ·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 기록되어 있다.



임연(林衍)의 무고를 당하여 유경(柳璥)과 함께 장차 유배(流配)되려 했으나 사명(詞命)을 맡으므로 해서 특히 사면되다.



처음에 공이 평장사 유경(平章事 柳璥) · 예부시랑 주열(禮部侍郞 朱悅), 장군 김정(將軍 金珽)등과 서로 교분이 좋았는데 임연(林衍)이 김준(金俊)을 죽이자 유경이 공에게 이르기를 지난날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더니 이제 그 사람들을 보건데 다 뭇 소인이 들이네하다



처음에 임연 · 김준 등과 함께 권신 최의(權臣崔誼)를 죽일 때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이란 호를 하사하였는데 그 뒤 임연이 김준을 죽일 때에도 역시 위사공신이라 부르니 그 이른바 사직을 보위하는 뭇 소인이란 말이 대개 임연을 지적한 것이다.



또 고사(古史)를 논란하다가 당시 환시(宦寺)들의 폐단에 언급한 바 있어 환관 김경(金鏡)이 임금에게 참소하여 나라를 원망한다 하였으므로 임금이 공을 불러 꾸짖기를 그대가 유경(柳璥)과 친교를 맺어 경사(經史)를 빙자하여 나라일을 비방했으니 내가 죄를 주려했으나 그 사명(詞命)을 맡아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노니 조심하여 다시는 그런일이 없게 하여라하고는 드디어 유경을 흑산도(黑山島)에 유배시키다. 이상은 여사제강(麗史提糠) · 동사회강(東史會綱) · 동국통감(東國通鑑) · 동국사략(東國史略) 및 유경견(柳璥傳)에 기록되어 있다.



12월 갑신(甲申)에 공이 윤군정(尹君正)과 함께 좌우복야(左右僕射)에 임명되다.(이상은 고려사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초에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여 백관(白官)을 통솔했고, 또 시중랑중(侍中郞中)을 두었다가 그뒤 상서성(尙書省)으로 개편하여 상서령(尙書令) 및 좌우복야(左右僕射)를 두었는데 충렬왕(忠烈王)때 중서문(中書門)에 합병하여 첩의부(僉議府)라 하였으니 지금 의정부(議政府)이다.



고려 원종11년 경오(庚午) 공의 나이 60세 추밀원 부사 정당문학(樞密院 副使 政堂文學)에 임명되다.(고려사 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원종12년 신미(辛未) 공의 나이 61세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승진되다.



아들 여우(汝盂)를 보내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다. 6월 기해(己亥)에 충렬왕이 세자로써 원나라에 볼모로 들어갈 때 공이 아들 여우(汝盂)가 한림학사로서 수행하여 세자를 위해 원나라 조정에 혼인을 청하여 4년동안 주선하는데 훈로(勳勞)가 많았다.



고려사세가를 상고하면 기해에 세자 심()을 몽고에 볼모로 보낼적에 상서우승 송분(尙書右丞 宋)과 군기감 설공검(軍器監 薛公儉)과 호부랑중 김서(戶部郞中 金)20인이 수종하는데 추밀원 부사 이창경(樞密院 副史 李昌慶)에게 그 일행을 조호(調護)하도록 명령하다.



이에 표를 올려 아뢰기를 ()으로부터 재상에 이르기까지 그 자제들로 하여금 번갈아 입시(入侍)하게 하려 하오니 먼저 세자를 모실 의관(衣冠)의 아들 21인과 아내직원(衙內職員) 백명을 보내주소서하였는데 공의 아들 여우가 그 20인 뽑는 중에 들어 있었다.



고려 원종14년 계유(癸酉) 공의 나이 638월에 강윤소(康允紹)를 탄핵하다.



이때 상감께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을 하례하는데 달로하치(達魯花赤)도 그들의 관속을 인솔하여 오른쪽에 서있었다. 내수()인 상장군 강윤조(上將軍 康允紹)가 호복(胡服)차림으로 바로 들어와 스스로 객사(客使)에 견주어 왕을 보고도 절하지 않다가 왕께서 성절의 수배(壽拜)를 올리자 일시에 다 일어나 호배(胡拜)를 올리다 상감께서 노여워하면서도 재재하지 못하고 유사(有司)를 역시 감히 힐란하는 이가 없었다.



공이 이에 호되게 탄핵하니 달로하치가 성내어 말하기를 윤소가 먼저 머리를 깎고 상국(上國)의 예를 따르거늘 도리어 탄핵하느냐하고는 장차 위협하려 하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고하였더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내 차라리 견책을 당할지언정 어찌 그 종놈을 탄핵하지 않겠느냐하다 대개 윤소는 본래 신안공(新安公)의 집종이였는데 몽고 말을 해득하므로써 간사하게 원종(元宗)에게 가까워졌다가 그 뒤 죄를 얻어 스스로 불안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머리를 깎은 자인데 돌아와서는 스스로 객사(客使)에 견주어 달로하치 홍다구(洪茶丘)에게 아부하여 해칠 것을 도모하는 자이였다.



10월 갑인(甲寅)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표를 올려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표는 문집에 실려있다.)



이때 공이 같은 지공거 이의()와 함께 진사 정현좌(進士 鄭賢佐) 20인과 명경과(明經科) 급제 한 사람을 뽑았다.



옛 제도에 의하면 과거시험날 승선(承宣)이 어인(御印)을 받들고 시원(試院)에 도착하면 같은 지공거들이 뜰에 내려 맞이하여 지공거들은 북쪽을 향해 서고 당상(堂上)은 자리를 피해 기다리게 되어 있었다.



이때 홍자번(洪子藩)이 승선으로서 어인을 받들고 시원에 가면 지공거들이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 어느 예를 따라야 하겠습니까하자 상감께서 이르시기를 어인이 있으니 마땅히 뜰에 내려야 하리라하다.



자번이 공원(貢院)에 가서 힐책하기를 내가 어인을 받들고 왔거늘 지공거들이 뜰에 내려 맞이하지 않으니 내가 감히 들어갈 수 없소하다.



공이 대답하기를 숭선이 재상에게 올때까지 재상은 앉아서 기다리다가 이제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는 것도 예에 지나치거늘 하물며 뜰에 내려 맞이함이겠는가하니 자번이 말하기를 이미 어명을 받고 왔습니다.하므로 공이 부득이 뜰에 내려 맞이하다. 이상은 여사선거지(麗史選擧誌) 및 홍자번전(洪子藩傳)에 기록되어 있다.



참외문신(參外文臣 : 7품에서 9품까지의 문관)들에게 고시 보일 것을 건의하다. 이때 공께서 건의하기를 근래 후생(後生)들이 과거(科擧)만 치르고 나면 저술(著述)에 태만하여 표 · (表箋)을 짓는데도 격식에 맞지 않으니 마땅히 참외문신들에게 고시하여 그 능한 자에겐 상을 주어야 하겠습니다.하다. 왕이 윤허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이상은 고려사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원종15년 갑술(甲戌) 공의 나이 648월 무진(戊辰)에 아들 한림학사 여우(汝盂)가 세자(世子)를 따라 원()나라에서 돌아오다.



5월 병술에 충렬왕이 원세조(元世祖)의 딸 안평공주(安平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6월 계해(癸亥)에 원종(元宗)이 승하하다. 8월 무진(戊辰)에 충렬왕이 돌아와 즉위하면서 곧 여우에게 단서(丹書)를 하사하였으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 신미(辛未)년에 과인(寡人)이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천정(天庭 : 천자의 조정)에 입시하여 온갖 어려움을 겪을 적에 그대는 나라를 위했을 뿐 가정을 잊고 4년 동안이나 수종하며 근로(勤勞)하는데 시종 한마음으로 과인을 보좌했고 천척(天戚)에 혼인까지 청하여 다시 삼한(三韓)을 안정시키고 만국에 영화로움을 보여주었다.



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훈로를 기록해주노라하였다. 단서록(丹書錄)의 권판(券板)은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공종 덕우(恭宗 德祐) 원년 고려충렬왕 원년 을해(乙亥) 공의 나이 65세 겨울에 첨의부찬성사(僉議府贊成事)로 직함이 바뀌어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를 겸하고 이내 참문학사판판도사사(參文學事判版圖司事)에 승진되다. (열전(列傳) 및 율곡집(栗谷集)에 기록되어 있다.)



단종 겸염(端宗景炎) 원년 충렬왕 2년 병자(丙子) 공의 나이 66세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여 설인(舌人 : 통역관)들의 간사한 폐단을 막을 것을 건의하다.



이때 설인들이 미천(微賤)한 자가 많아 통역하는 사이에 사실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혹은 간사한 마음으로 사리사욕을 도모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참문학사(參文學事)로서 건의하기를 통문관을 설치하여 금내학관(禁內學官)으로 하여금 젊은 문관들을 참렬(參列)시켜 한어(漢語)를 연습하게 하옵소서하였으니 대개 금내 학관이란 곧 비서(秘書) · 사관(史館) · 한림(翰林) · 보문각(寶文閣) · 어서각(御書閣) · 동문원(同文院)에다가 식목(式木) · 도병마(都兵馬) · 영송(迎送) 등을 합한 것을 금내구관(禁內九官)이라 한다.



이상은 고려사백관지(高麗史百官志) · 동사회강(東史會綱) · 여사제강(麗史提綱) ·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기록되어 있다.



석말천구(天衢)가 영춘시(迎春詩) 짓기를 청하는 것을 거절하다.



봄에 달로하치 석말천구의 사관()에 익명(匿名)으로 투서한 자가 있어 거기에 이르기를 정화공주(貞和公主)가 총애(寵愛)를 잃어 여자 무당을 시켜서 안평공주(安平公主)를 저주(咀呪)한다.하고, 또 한편 대신들이 반역(叛逆)을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공주가 궁주(宮主)를 가두고 석말천구는 수상(首相)을 가두고서 여러 사름을 문초하였다.



그런데 석말천구가 갑자기 말하기를 봄철이 이미 가까워졌으니 제군(諸君)들이여 영춘시(迎春詩)를 지으시로하다. 공이 슬픈 안색으로 시를 짓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왕비와 수상이 모두 수감되어 있는 중이라 시 따위 지을 때가 아니다하니 천구(天衢)가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려 2년 충렬왕 3년 정축(丁丑) 공의 나이 67세 정월 갑오(甲午)에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다.



이때 김방경(金方慶)은 사()에 유경(柳璥)은 부(), 원부(元傅)는 보(), 허공(許珙) · 홍록추(洪祿) · 이분희(李汾禧) · 한강(韓康)은 조호(調護)에 임명되니 다 한 시대의 선발된 인물들이었다. 여사세가(麗史世家) 및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기록되어 있다.



5월 임인(壬寅)에 공이 동수국사(同修國史)를 겸하여 감수국사(監修國史) 유경과 수국사 원부(修國史 元傅)와 더불어 고종실록(高宗實錄)을 편수하다(여사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제병 상흥(帝昺 祥興) 원년 충렬왕 4년 무인(戊寅) 공의 나이 682월 정묘(丁卯)에 다시 참문학사(參文學事)에 임명되다(여사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9월 정미(丁未)에 별세, 향년이 68세라 왕께서 이르기를 ()는 일찍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니 조례(吊禮)와 뇌문()에 마땅히 평장으로 쓸 것이며 관()에서 장사(葬事)를 비호하라하고, 시호를 문정공(文貞公)이라 하다.



공의 성품이 진실하여 외화(外華)의 꾸밈이 없고 말씀이 적었으나 국사(國事)를 논함에 있어서는 간절하고도 정직하여 기피하는 바가 없었으며 워낙 문장에 능하므로 늘 사명(詞命)을 맡게되다.



상국의 징계와 힐책이 자못 없는 해가 없었으나 공이 오랫동안 표() 맡아 짓되 그 일에 따라 문장을 조절하여 다 이치에 맞게 함으로 윤허를 많이 받았고 원나라 한림학사 왕악(翰林學士 王)이 표사(表詞)를 볼 때마다 반드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그 한번 대면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다.(이상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 여사제강(麗史提綱) 동사회강(東史會綱) 및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사략(東國史略)에 기록되어 있다.)



공이 처음엔 부안현(扶安縣) 동쪽 선학동(仙鶴洞)에 자리잡아 계시다가 또 부안현 서쪽 변산(邊山) 바다위에 집을 지어 그 곳을 지지포(知止浦)라 이름하고는 두 곳을 소요(逍遙)하시면서 거문고와 서책으로 노년을 보내고 후학(後學)들을 교육하되 엄격히 과정(課程)을 세우니 한때 인재가 성하게 일어나다.



()는 처음에 개성 초산록에 장사 지냈으나 후에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에 있던 후손들이 귀향하면서 공의 체백을 모시고 현재의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모사(茅寺)의 북쪽, 사포(沙浦)의 동쪽, 명동(瞑洞) 간좌(艮坐)의 산록에 모셨으니 변산 12혈 중 하나로 선인무수형의 대명당이다.



200910월에 드디어 전라북도 지정문화재(기념물 127)로 지정되었습니다.



공께서는 고려조 국운이 어려웠던 시기에 외교, 학문, 문학, 행정 등 각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신 분으로 고려명현(高麗明賢)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상은 여사열전(麗史列傳),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사략(東國史略), 동문감(東文鑑), 탐라지(耽羅誌), 열전(列傳), 동문선(東文選),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 여사제강(麗史提綱), 동사회강(東史會綱), 유경전(柳璥傳), 려사선거지(麗史選擧誌), 홍자번전(洪子藩傳), 율곡집(栗谷集), 고려사백관지(高麗史百官志)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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